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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지키다 - 줄거리, 감상과 밑줄

by 하롸랑 2025. 7.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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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종합선물 세트입니다

그런 영화가 있다. 작품성을 갖추고 시각은 참신한데 오락성과 대중성마저 높은 사기 같은 영화들. 나에게는 이 책이 바로 그런 책이었다. 책에 기대할 수 있는 다양한 만족감을 한 번에 불러일으키는 책. 예술과 역사가 있고, 문장에 위트가 있으면서도 줄 긋고 싶은 통찰이 있고, 600여 쪽 되는 분량을 이어서 읽을 수 있도록 등을 계속 밀어주는 파도 같은 드라마가 있다. 

 

특별히 장면 묘사에 큰 공을 들인 것 같지 않은데도 책을 읽다 보면 마치 영상을 보는 것처럼 그림이 그려지는데, 아니나 다를까 저자 장바스티스 앙드레아는 영화계에 몸을 담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요즘 영화 특유의 세련된 편집과 늘어짐도 과도한 생략도 없는 알맞은 호흡이 느껴진다. 누군가 휴가 때 읽을 책을 추천하라면, 올해는 이 책이다. 

 

줄거리:  불운한 예술가,  딛고 일어서다

(※ 주의- 스포 있습니다!) 한 마디로 줄이니 소제목이 뻔해보인다. 사실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서사의 큰 구조는 천재예술가의 고난과 극복이다. 다소 많이 소비되어 왔던 그 흐름이 맞다. 하지만 이 책은 회상의 방식으로 이야기 초반에 결국 주인공이 이미 성공했음을 알려줌으로써 이 이야기에서 성공 자체는 중요한 것이 아님을 미리 귀띔해 준다.

 

주인공은 왜소증을 갖고 태어난 미켈란젤로 비탈리아니, 짧게는 '미모'이다. 책은 미모가 나이 들어 죽기 전에 일생을 회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는 조각가인 아버지에게 이어받은 재능이 있음에도 가난과 편견에 갇혀 쉽게 나아가지 못한다. 그러다 우연히 귀족 오르시니가문의 천재소녀 비올라를 만나며 꿈을 쌓아가고 기회를 잡게 된다.

 

읽다 보면 아멜리 노통브의 '공격'이 생각나서 우려스러워지는데 (오래된 이 책은 내용은 꼽추와 미녀의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을 다룬 것으로 자세한 내용은 흐릿하지만 참담했던 기억만큼은 뚜렷하다), 전혀 다른 책이다. 미모와 비올라는 서로의 꿈을 위해 서로를 지탱하며, 애정을 넘어서 깊이 공명하는 무언가로 이어져 있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어린 시절에 동화처럼 시작해서, 꺾이고 다시 일어서는 동안 맨들하게 다듬어지며 어른의 현실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명성을 얻고서도 현실에 떠밀리며 조각이 무엇인지 답을 하지 못하는 미모와, 어린 날 너무 빨리 꿈이 좌초되면서 주변의 요구에 맞춰 살아가는 비올라의 이야기가 서로 교차하며 교향곡을 이룬다. 비올라의 삶이 끝났을 때, 비로소 미모는 답을 찾아 이를 피에타에 새기게 되고 미모는 마지막 순간 날고 싶던 비올라가 알려준 바람의 이름들을 떠올리며 노래는 끝이 난다.

 

 

감상: 이룬다는 것. 닿는다는 것

스스로 어른이라고 자각한 어느 날 이후로 꿈이라는 말은 덧없게 느껴진다. 돌아보면 그 순도 높은 열정을 숙명처럼 품고 살 수 있는 것도 일종의 재능처럼 선택받은 누군가에게만 허락된 듯싶기도 하다. 해서 반드시 이루고 싶은 무언가가 있다는 주인공들의 간절함을 제대로 이해해 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어쩌면, 조각가가 되고 하늘을 나는 것보다 서로를 향한 맹세의 순간 자체가 너무 소중한 것이었기 때문에 미모와 비올라는 서로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무리하게 내달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주류의 세상에서는 비켜간 두 사람이 서로의 자리를 응시하면서 삶을 버틴다. 우주적 쌍둥이의 존재라니 부러울 따름이다.

 

마지막에 미모는 비올라를 조각하지만, 미모의 삶은 비올라라는 끌에 다듬어지며 조각된 결과이다. 미모의 삶에 굵직한 이정표들 - 꿈을 결심하고 지켜가고, 예술과 사상을 깨닫고, 파시즘에서 깨어나는 -을 비올라가 바꾸었으니 이런 생각이 비약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사는 삶의 모양이 모두 달라도 무언가를 이루는 일과 누군가에게 닿는 일들이 어지럽게 얽혀가는 본질은 비슷하지 않겠는가. 

 

 

밑줄: 수많은 심연을 건너게 하는 어떤 순간

밑줄을 되짚어 보니 비로소 이해되는 이 장면

 

 

나도 그런 순간이 있었다. 어려울 때나 괴로울 때 자꾸만 호출되는 순간 자꾸 생각나는 사소한 기억 – 이를테면 대학교 때 친구가 별생각 없이 건네준 데파페페 앨범을 들으며 찐득한 우울함에서 딛고 일어나던 기억. 미모의 삶에 큰 버팀목이 세워지던 이 날을 회고하던 위의 장면이 사실상 이 책의 내용을 거의 설명하고 있다고 본다. 

 

 

나는 비올라의 손을 다시 잡는 즐거움을 맛보려고 손을 잡고 조금 있다 다시 놓기를 반복했다.

p. 141 

 

너무 귀여워서 견딜 수 없었던 두 사람의 어린 시절 친해지는 장면. 이 책은 두 사람이 무덤에서 만나는 이 장면 까지만 빌드업을 견디면 그 뒤는 술술 넘어간다.

 

미모, 충고 하나 하지. 인내해라. 이 강, 변함없이 고요한 이 강처럼 말이야. 이 강, 아르노강이 화를 낸다고 생각하니?

p.259 

 

미모를 아껴주던 메티가 실력은 있지만 불합리한 대우에 화내던 미모에게 들려준 말. 나도 화날 때 생각해야겠다.. 학의천이 화를 낸다고 생각하니..? 그리고 아르노 강 둑은 얼마 후 터진다

   

50리라, 숙련공이 받는 급여의 6분의 1. 내게는 엄청난 액수. 피에트라달바, 비토리오, 오르시니 가문, 내게 비올라의 소식을 전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에게든 편지를 보낼 수 있게 엄청난 수의 우표를 살 수 있는 액수.

p.249 

 

겨우 얻게 된 코딱지만 한 급여를 친구 소식 물을 수 있는 우표값으로 환산하던 미모의 모습. 여기서 울컥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꼭 소유해야만 하는 작품을 만드는 작가가 되었다. 이 모든 것이 새로운 말을 하나 배웠기 때문이었다. 아니오. 이 세 음절의 말이 갖는 권력은 상식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p.337 

 

조각가로 성공한 미모가 거절의 아이러니를 깨닫는 모습. 나도 소장님이 업무 지시하실 때 아니요라고 말해서 권력을 갖춰야겠다(!).

 

 

그 누구도 자신에 의해서보다 더 잘 대접받을 수는 없는 법이다.

p.518 

 

미모가 왕립 아카데미의 자격을 얻어 스스로를 위한 파티를 준비하면서 남긴 말. 왕립 아카데미 임명식 씬이 정말 통쾌하다.  

 

 

그는 진정하라고 명령하더니 자신은 아무런 나쁜 짓도 하지 않았다고 단언했는데, 그건 사실이었다. 악의 아름다움은 바로 악이 아무런 노력도 요구하지 않는 것이기에. 그 누구도 결코 나쁜 짓을 저지르지 않는다. 그저 악이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p. 529 

 

미모가 옛 친구(?) 지인들을 수용소에서 구해내는 장면. 악의 평범성, 한나 아렌트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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