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하고 여리면서 섬세한
날이 더워지면서 추리 미스터리 스릴러 책들에 손이 가게 되는데, 그 사이에 끼어있는 클레어키건의 이 책은 불닭볶음면 사이에 끼어있는 평양냉면처럼 슴슴하다. 누군가는 기기기승이라고 평하는 이 책은 별다른 격정 없이 비극을 스치며 지나간다. 사실 어린아이가 짓이겨지거나 학대의 대상이 되는 장면을 마주칠까 봐 마음 졸이면서 봤다 (완벽한 아이 같은 책이 읽기 힘들었던 경험이 있었기에). 관련된 장면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다행히 작가가 거기에 몰두하지는 않았다. 그의 시선은 다른 곳에 닿아있다.
줄거리: 힘들게, 하지만 기어코 옮아가는 선의
(※주의 - 스포 있습니다!) 주인공 펄롱의 삶은 간신히 안정적이다. 딸들과 아내와 그럴듯한 모양으로 살지만, 발을 헛디디면 금방 시궁창에 빠질 듯이 위태한 삶이다. 자신의 가족 정도를 간신히 건사할 수 있는 그는 매번 선의를 참는 것에 실패해 아내에게 타박을 받는다. 아내의 눈치를 느끼면서도, 일을 한 순간도 놓지 못하는 아내에게 미안함을 느끼면서도 그는 수녀원의 생면부지 소녀의 열악한 상황을 알고 끝내 그 아이를 떠안게 된다.
그의 도를 넘은 선의는 가족도 아닌 어린 펄롱을 살뜰하게 돌봐준 미시스 윌슨과 그의 뒤에 자신을 숨기며 곁을 지킨 아버지 네드가 있다. 펄롱의 삶이 그 애정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기에 선의는 사람에서 사람으로 다시 옮아가게 된다. 누군가의 강제된 압력행사도 없이 그저 그를 사랑했던 사람들과의 순간들이 반복적으로 다가와 결국 발걸음을 움직이게 만든다.
감상: 팍팍한 삶 위에 큰 돌 하나 더 얹을 용기
호구다. 오지라퍼다. 넉넉하지도 않은 형편에 자신의 가족의 몫을 줄이고 좋은 일 하겠다고 우리 가족 중 누군가 얘기하는 상상을 하는 것 만으로 답답하다. 그러나 이 책을 덮고 가만히 생각하면 질문이 떠오른다. '그럼, 누구를 도울만큼 충분히 여유로운 순간은 언제 찾아오는 걸까?' 기약 없는 약속을 하면서 - 내가 시간 많고 돈 많아지면 좋은 일도 해보겠다 말하면서 순간의 회피와 눈감기를 정당화하는 건 아닐까. 적어도 난 의지 치는 없어, 아직 상황이 아닐 뿐이야,라고 말이다.
지금 세상은 불안을 조장한다. AI가 일자리를 빼앗을거야, 지금 안 사면 없어질 거야, 아이가 대학에 못 가면 낙오할 거야. 불안은 대체로 소비의 동력이 되어 이 시스템을 유지하는 좋은 재료가 된다. 열심히 하고 있지만 불안은 끊임없이 공급되기에 주변을 돌아볼 여유는 금세 동이 난다.
이 책에서는 그 시대의 어려움과 불안 그 속에서 싸우고 지고 이겨가며 간신히 다른 사람을 돕는 펄롱의 모습이 나온다. 그냥마냥 착한 심성 때문에 어떻게든 주변 사람을 도왔습니다,라고 끝나지 않고 무엇을 희생하고 어떤 고민을 감내해야 하는지 그 과정을 세심하게 다루고 있는 점이 인상 깊었다. 솔직히 감명받았다 해도 나는 펄롱처럼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반, 또는 반의 반만이라도 누구에게 작은 도움을 내밀 수 있다면 조금 뒤처지고 손해 보는 것쯤 눈 딱 감고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밑줄: 최악의 일은 해야할 일을 하지 않는 것
무언가를 하지 않는 일은 눈에 띄지 않기에 간과하기 쉽다. 많은 경우 이러한 무위의 방조는 적극적인 행동이 없기에 드러나는 일도 없이 책임이라는 것도 희미해진다. 오로지 반듯한 양심만이 옳았던 일인지 되물어오는 것이다. 하지만 답하지 않는다면 그 소리는 희미해져 끝내 들리지 않게 될 수 있다. 당신은 아직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가?
클레어 키건은 막달레나 세탁소에서 학대받는 사람들을 위해 이 책을 헌정했지만 어쩌면 서로에게 관심을 잃어가는 지금의 우리를 다른 사건과 사람을 거울 삼아 비춰보려고 했던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