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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은 여름 - 줄거리, 감상과 밑줄

by 하롸랑 2025. 5. 29.

오래전 이동진 평론가가 운영했던 팟캐스트 '빨간 책방'에서 소개되었지만 읽지 않고 남겨두었던 김애란 작가의 '바깥은 여름'을 읽었다. 팟캐스트가 오래되어 줄거리를 거의 잊어버렸는데, 요즈음 슬슬 더워지는 날씨에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제목만 대충 보고 별생각 없이 고른 책은 의외의 내용을 가지고 있었다.

 

바깥은 여름.. 그러면 안쪽은?

처음에 책 표지를 보았을 때는 푸르른 표지와 따뜻한 색감에 산뜻한 내용 아닐까, 하고 예상하게 된다. 바깥은 이라는 말도 보이지 않고, '여름'이라는 단어만 도드라져 읽혔다. 그리고 책을 다 읽고 나서 덮으면서 말하게 된다. 아, 바깥 '은' 여름이라고.  모두 일곱 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이 책은 어떠한 방식으로 누군가를 잃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상실 그 자체의 충격과 함께 상실 이전과 그 이후 남겨진 사람들의 일상에 대해 얘기한다. 어제 혹은 지난주, 뉴스 한토막으로 보았던 것 같은 기시감이 드는 이야기들. 어쩌면 주목받기 어려운 다소 흔한 죽음, 이별의 이야기들과 이를 둘러싼 삶의 이야기가 있다.

줄거리: 모양은 다르지만 모두 지극히 인간다운 상실에 대한 반응

아무래도 아이를 키우는 부모로서 첫 작품 「입동」은 특별했다 (책이 어떤 내용인지 감을 잡지 못해서 더 충격이 컸을 수 있다). 아이를 잃은 부부가 아무 말 없이 각자의 방식으로 슬픔을 꾸역꾸역 소화하는 모습. 기나긴 침묵 속에서 서로의 아픔을 주시하는 부부. 그 적막한 풍경 속에서 슬픔은 덜어지지 않고 말 없이 계속 번져간다. 묵묵히 견디던 이들이 아이가 귀퉁이에 쓴 글자를 발견하고 엉엉 우는 모습은 소중한 사람의 상실, 그 그림자가 얼마나 길고 긴 것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노찬성과 에반」은 내가 겪지 않았는데도 마치 그런 일을 겪은 것 마냥 생생했다. 어린 마음에 무언가를 소중하고 애틋하게 여겨 정성을 다하겠다가도 결심했다가도 내가 하고 싶은, 또는 갖고 싶은 달콤한 어떤 것과 저울질하다 끝내 합리화해버리고 마는 모습. 그리고 모든 것이 지나간 뒤에 밀려오는 자신에 대한 실망감. 오랜 연인과 헤어지는 과정을 그린「건너편」에서는 차갑게 식은 마음과, 빌미를 만들어 죄책감을 걷어주게 된 상대의 상황을 보며 죄책감의 면제에 안도하는 마음. 좋은 책이 늘 그렇듯 곁에서 본 것만 같은, 나 자신 었던 것만 같은 생생한 캐릭터들과 그 마음이 흐르는 모습을 포착하는 날카로움이 돋보였다.

 

「가리는 손」은 따스하게 시작해서 서늘하게 하강하며 끝나는 작품이다. 마치 영화 '마더'의 아주 부드럽고 섬세한 버전을 보는 것 같았다. 그래도 마지막 단편「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는 이 책을 덮는 독자를 배려하듯 온기를 가득 채워두었다. 상처받은 사람이 또 다른 상처받은 사람을 애써 위로할때의 감동이 선물처럼 책 마지막에 기다리고 있다.

 

 

감상: 인간의 겹겹을 나누는 상실

이 책은 상실을 다루지만 누군가를 위로하기 위해서, 상실을 병으로 정의하고 치유하기 위해서 쓰인 소설이 아니다. 오히려 사람의 여러 면을 들추어내기 위해서 상실을 도구삼은 것 같다. 표지처럼,  문 안쪽의 어둠의 결은 이렇게나 많고 또 다른 문에는 다른 색깔의 어둠이 있어라고 말하듯. 우리는 좋을 때, 편안할 때, 만족할 때 대체로 모두 좋은 사람이다. 하지만 아프고 부끄러울 때에 비로소 들춰지는 면이 있고, 김애란 작가는 그것을 이 작품으로 매우 섬세하게 풀어 보여준다.



밑줄

p.173 그럴 땐 ‘과거’가 지나가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차오르고 새어나오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나를 지나간 사람, 내가 경험한 시간, 감내한 감정 들이 지금 내 눈빛에 관여하고, 인상에 참여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표정의 양식으로, 분위기의 형태로 남아 내장 깊숙한 곳에서 공기처럼 배어 나왔다. 

 

이 문장에서 선한 삶을, 더 힘들지만 더 바른 선택을 한 사람들에게 현생에서도 이것이 보답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과거가 사라지지 않는 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무섭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안도되는 일이다. 

 

p. 214 '이해'는 품이 드는 일이라, 자리에 누우면 벗는 모자처럼 피곤하면 제일 먼저 벗어던지게 돼 있거든.

누구나 좋은 사람이기 쉬운 날들이 있다. 어제와 비슷한 일상, 별다를 일 없는 하루, 어쩐지 좋은 날씨와 적당한 행운. 하지만 슬프고 힘든 순간 우리는 자신의 좋은 면들을 하나둘씩 내려놓기 시작한다. 당신은 무엇을 가장 먼저 내려놓는가? 이것이 당신의 뒷모습을 설명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