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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 줄거리, 감상과 밑줄

by 하롸랑 2025. 5.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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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영원히 할 일을 마치지 못할 우리를 위한 책

 
문고판, 시집과 같은 얇은 두께와 감성적인 연보라색 표지에 편안한 마음으로 책을 열었다가 페이지의 무게에 몹시 당황하게 되는 반전매력의 책이다. 처음 1장은 내가 저자의 말을 알아듣고 있긴 한 건지 조차 의문일 정도로 어려웠다. 책이 끝나고 나서도 자신 있게 '소화했다'라고 말하지는 못하겠다. 이 책 자체가 어느 정도 수준 이상으로 주요 철학에 통달한 것을 전제로 논의를 전개할 때가 있다. 그러나 부분 부분 이해한 문장들을 그물같이 성기게 이어도, 이전까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세상에 대한 관점을 열어주는 책이었다.

​줄거리: 기회와 성장, 그 자체가 당신을 고갈시킨다

많은 역사책을 보면, 계급과 불평등의 오랜 시간을 지나 우리는 현대에 이르러 성과주의라는 아름다운 결실에 도달하는 방식의 설명이 전개된다. 분명 지난 시대에 비해 현대의 문명국에선 사람 간의 형평성은 개선되었다. 그러나 성과주의 사회를 사는 우리는 제대로 인지하지도 못한 채 자기자신을 착취하게 유도하고 있다.

더 나은 나, 더 나은 내일이 되기 위해서 자기 자신과 끝도 없는 레이스가 펼쳐진다. 저자에 따르면 이는 오로지 자신의 욕망을 매개로 하며, 자유라는 이름 안에서 행해지기 때문에 더 효율적이다("누가 시켜서 하는게 아니라 내가 하고 싶어서 열심히 사는 거라고요!"). 우리는 그게 옳은지 아닌지 의심조차 하지 않고 갓생을 추구한다. 

매일 밤 잠들기 전이면 이상화된 자아와 현실의 나 사이의 괴리를 느끼며 무력감은 우울증으로 발현한다. 오늘은 왜 이것 밖에 못했을까? 내일은 더, 더, 무얼 하면 좋을까? 이 겨루기는 미래를 향해 무한하게 이어진다. 안식은 언제까지고 손에 잡히지 않는다.

요컨대 오늘 이 기회의 세상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있다. 바로 그러하기에 별 것 이루어 내지 못한 날들은 우리를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누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스스로가 자책한다. 성실하고 평범한 하루조차 잃어버린 기회가 있었던 것 같다. 특별히 잘못 한 것 없이 괜찮게 보낸 하루도 낙오에 대한 공포(일명 FOMO)를 만드는 재료가 된다.

일은 해도해도 쌓여있고 기회는 매일매일 사라져가는 듯 하다. (사진: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

감상: 성장은 선이라는 환상에 균열을 주다

피로사회를 읽을 당시 나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성장이었고, 성장임이 자랑스러웠으며 여기에 물음을 가질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모든 부산한 행동과 정보 수집, 길게 이어지지 못하는 새로운 활동과 배움들, 조급한 마음들이 스스로를 고갈시키고 있는 줄은 몰랐다.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다고 느낀 순간 만난 책이었으며 낯선 비유와 압축된 언어들이 삼키기 쉬운 스타일은 아니었다. 정확히 이해 못한 부분도 있었지만, 이 책이 그때의 나를 구했다는 사실만큼은 변함없다.

현대 사회는 내가 여러 가지 정체성을 갖기를 바란다 (한창 유행했던 N잡러, 부캐 이런 말들이 떠오르지 않는가? 심지어 이 책을 읽기 얼마 전에 나는 '모든 것이 되는 법'이라는 책까지 감명 깊게 읽은 상황이었다.). 그것이 자본주의 생산 시스템에 더 유용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끊임없는 변화를 요구받으며, 무엇도 충족되는 일이 없이, 흐릿한 정체성을 가지고 괴로워한다. 남는 것은 공허함과 번아웃이다. 미칠 듯이 바쁜 우리는 점점 파편화되고 고립된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까? 좋은 피로(책에서는 '근본적 피로')를 느껴야 한다. 좋은 피로란, 세계를 신뢰하는 것이며 무언가를 하지 않음을 통해서 영감을 받는 일이다. '피로의 영감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보다 무엇을 내버려 두어도 괜찮은지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p.69).' 분주함을 덜어내고 깊은 심심함과 사색의 시간을 밀어 넣자.

 

비어있음의 즐거움을 느껴보자, 어떤 의심과 후회도 없이. (출처:Michael Leuning)

자아를 줄이고 그 자리에 세계를 받아들이면서 느슨하게 연대해야 한다. 세상을 응시하고, 이질적인 대상과도 생각과 마음을 나누고, 나를 둘러싼 견고한 경계를 흩트리자는 메시지로 느껴졌다. 잘게 파편화되어 불안한 우리를 마침내 구원해 줄, 피로사회의 도래를 기대한다 (책을 다 읽고 나면 피로사회가 좋은 뜻이었구나 하고 의외의 반전을 만나게 된다).

혼동과 불안의 시대에 우리가 할 일은 자신을 내려놓고 서로에게 친절해지는 것. (사진: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

 

밑줄: 무엇을 하지 않고 내버려 둘 것인지에 대해 얘기하자

 

이 책은 밑줄 긋기 시작하면 그을 곳이 너무 많다. 밀도 높고 정제되어 있으며 날카롭다. 파인다이닝에서 커다란 접시 한가운데 올라온 예술적 요리처럼 함축적이다. 밑줄 중 일부를 옮겨본다.

 

규율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다. 반면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낸다. p.24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p.28

즉 어떤 목표를 달성했다는 느낌은 자아 감정의 고양을 위해 의식적으로 "회피"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어떤 목표를 달성했다는 느낌 자체가 결코 찾아오지 않는 것이다. p.90

우울증, 소진증후군,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와 같은 오늘날의 정신 질환은 심적 억압이나 부인의 과정과는 무관하다. 그것은 오히려 긍정성의 과잉, 즉 부인이 아니라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무능함, 해서는 안됨이 아니라 전부 할 수 있음에서 비롯된다. p.92

과도한 선택의 자유를 누리는 후기근대의 성과주체는 강력한 유대의 능력을 잃어버린다. 우울증은 모든 유대를 끊어버린다.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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