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잘난 척하고 싶어서 읽었습니다.
미리 고백하지만 나는 이 책을 순전히 허영심과 자존심을 동인 삼아서 읽기 시작했다. 일단 총, 균, 쇠를 읽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총,균,쇠는 일단 책 제목이 어쩐지 멋들어지고 책도 두껍고 (그래서 멋들어짐이 더해지고) 서울대생들이 가장 많이 빌린 도서로 스테디셀러이며, 책에 큰 관심 없더라도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법한 유명한 책이다. 이후 출간된 유발하라리의 사피엔스와 더불어 빅히스토리 대표작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벽돌책 깨기 챌린지에 (코스모스와 더불어) 반드시 포함될 것만 같은 이 책을, 친구가 '너무 재밌어서 책장 넘기기 아깝다'라고 호들갑을 떨길래 읽기 시작했다.
개인적으로는 읽어내기 힘들었다. 같은 이야기가 반복되는 느낌 때문에 더 그러했다. 차마 맨 뒤의 부록 (그것도 상당 긴)까지는 보지 못하고 책장을 덮었다. 이 책을 추천한 친구는 사피엔스를 재미없다고 했는데, 나는 반대로 사피엔스는 무척 재밌게 보았다. 어쩌면 총, 균, 쇠와 사피엔스 안에 무언가 상반된 것이 존재하는 건가? 생각하게 만든다. 재밌는 것은 유발하라리가 이 책에 영향을 받아 사피엔스를 썼으며, 추천사까지 써줬다는 점이다.
줄거리: 당신이 그렇게 살게된 건 단순히 거기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왜 어떤 나라는 잘 살고 어떤 나라는 못 사는 걸까? 그 이유는 인종의 우열이나 근면성의 차이 때문이 아니라 얼마나 혜택 많은 땅에서 태어났는가로 결정된다'를 길게 풀어쓴 이 야이다. 줄거리 아주 거칠지만 요약해보자면, 잘 사는 나라가 잘 살게 된 것은
- 그들의 조상이 우연히 식용 작물/가축을 얻기 쉬운 땅에서 살았다
- 심지어 그 땅의 지리, 기후 등 조건은 그것들이 확산되기에 유리했다
- 정착하며 인구가 증가한다
- 밀집으로 인한 병에 시달리다 항체를 갖는다
- 언어, 기술, 정치체계가 고도화된다
- 총균쇠를 들고 남의 나라를 정복한다
- 이긴다
- 다시 1.부터 시작하시오
이와 유사한 이야기게 계속 반복된다, 주제 하나 늘 끊임없이 변주하는 교향곡처럼. 따라서 이 책은 나에게는 뒤로 가면 갈수록 은근히 지루함을 느끼게 하는 책이었다.

게다가 옹졸하게 트집잡자면 이 책의 이름이 왜 총균쇠인지는 잘 모르겠다. 총은 기술, 균은 세균이라서 중요하다 치면 쇠는 뭐가 중요할까? 총이랑 좀 겹치는 듯도 하다. 오히려 핵심 기전인 가축화, 작물화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었어야 할 것 같다. 예를 들면 "총, 균, 쌀" "총, 균, 소", "쌀, 균, 소" 이런 이름이 더 맞지 않나 하는 시답지 않은 생각을 해보았다.

예를 들어 이 책의 이름을 현대 도서시장에 정서에 맞추어 지으면 이런 느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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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주제가 되는 지리결정론이 나라 간 삶의 격차를 설명하고 있다는 부분에서 번뜩인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주제를 강화하는 방식에서 피곤함을 느낀 책이다.
감상: 지겨울 수 있으니 문학처럼 즐기며 보기
혹시 누구든 이 책에 도전했는데 비슷하게 반복 때문에 책을 그만 읽고 싶다는 충동이 자꾸 느껴진다면 이렇게 생각하는 방향을 잡아보라고 권하고 싶다 -이 책은 너무나 교과서처럼 생겼지만, 어떤 논리의 흐름을 즐기려 든다면 생각 외로 단순한 반복에 지치기 십상이다. 오히려 문학책 읽듯이 열거되는 사례와 텍스트의 맛 그 자체를 하나하나 즐긴다는 관점에서 다가서야 여차저차 부록 앞까지 갈 수 있다. 어쩌면 서울대생들이 가지고 있는 핵심 능력은 끝까지 밀고 가는 우직함과 인내력인가, 하는 생각을 들게 만든 책이다.
밑줄: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가 아니다
그럼에도 이 책이 발명에 대해 서술한 부분은 퍽 마음에 와닿았다. 현재 하고 있는 업무가 기획이며 새로운 것을 만드는 일이라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서비스기획자는 사람들의 필요에 반응하여 이를 구조화하는 일을 한다. 유저 리서치를 할 때, 우리가 가장 많이 듣는 말은 스티브잡스는 유저리서치를 신뢰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싫지만 그 말이 떠오르게 하는 문구였다. 어쩌면 잡스도 사람들의 잠재니즈가 아니라 본인이 직관으로 추구한 것을 세상에 보여준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