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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균, 쇠 - 줄거리, 감상과 밑줄

by 하롸랑 2025. 5. 31.

네. 잘난 척하고 싶어서 읽었습니다.

미리 고백하지만 나는 이 책을 순전히 허영심과 자존심을 동인 삼아서 읽기 시작했다. 일단 총, 균, 쇠를 읽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총,균,쇠는 일단 책 제목이 어쩐지 멋들어지고 책도 두껍고 (그래서 멋들어짐이 더해지고) 서울대생들이 가장 많이 빌린 도서로 스테디셀러이며, 책에 큰 관심 없더라도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법한 유명한 책이다. 이후 출간된 유발하라리의 사피엔스와 더불어 빅히스토리 대표작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벽돌책 깨기 챌린지에 (코스모스와 더불어) 반드시 포함될 것만 같은 이 책을, 친구가 '너무 재밌어서 책장 넘기기 아깝다'라고 호들갑을 떨길래 읽기 시작했다.

 

개인적으로는 읽어내기 힘들었다. 같은 이야기가 반복되는 느낌 때문에 더 그러했다. 차마 맨 뒤의 부록 (그것도 상당 긴)까지는 보지 못하고 책장을 덮었다. 이 책을 추천한 친구는 사피엔스를 재미없다고 했는데, 나는 반대로 사피엔스는 무척 재밌게 보았다. 어쩌면 총, 균, 쇠와 사피엔스 안에 무언가 상반된 것이 존재하는 건가? 생각하게 만든다. 재밌는 것은 유발하라리가 이 책에 영향을 받아 사피엔스를 썼으며, 추천사까지 써줬다는 점이다. 

 

줄거리: 당신이 그렇게 살게된 건 단순히 거기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왜 어떤 나라는 잘 살고 어떤 나라는 못 사는 걸까? 그 이유는 인종의 우열이나 근면성의 차이 때문이 아니라 얼마나 혜택 많은 땅에서 태어났는가로 결정된다'를 길게 풀어쓴 이 야이다. 줄거리 아주 거칠지만 요약해보자면, 잘 사는 나라가 잘 살게 된 것은

 

  1. 그들의 조상이 우연히 식용 작물/가축을 얻기 쉬운 땅에서 살았다
  2. 심지어 그 땅의 지리, 기후 등 조건은 그것들이 확산되기에 유리했다
  3. 정착하며 인구가 증가한다
  4. 밀집으로 인한 병에 시달리다 항체를 갖는다
  5. 언어, 기술, 정치체계가 고도화된다
  6. 총균쇠를 들고 남의 나라를 정복한다
  7. 이긴다 
  8. 다시 1.부터 시작하시오


이와 유사한 이야기게 계속 반복된다, 주제 하나 늘 끊임없이 변주하는 교향곡처럼. 따라서 이 책은 나에게는 뒤로 가면 갈수록 은근히 지루함을 느끼게 하는 책이었다.

책과 다툰 흔적 - 아니, 책은 가만히 있는데 시비건 흔적



 

게다가 옹졸하게 트집잡자면 이 책의 이름이 왜 총균쇠인지는 잘 모르겠다. 총은 기술, 균은 세균이라서 중요하다 치면 쇠는 뭐가 중요할까? 총이랑 좀 겹치는 듯도 하다. 오히려 핵심 기전인 가축화, 작물화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었어야 할 것 같다. 예를 들면 "총, 균, 쌀" "총, 균, 소", "쌀, 균, 소" 이런 이름이 더 맞지 않나 하는 시답지 않은 생각을 해보았다. 

 

[유럽의 총기, 병원균, 쇠가 원주민을 지배했다]는 소챕터에 총균쇠 중 '쇠'만 설명해주지 않아서 화가 난 노트

 

예를 들어 이 책의 이름을 현대 도서시장에 정서에 맞추어 지으면 이런 느낌일까?

[재테크] 문제는 입지야! 13,000년 인류사가 증명하는 부동산 가치투자의 중요성, ★특별부록★ 세계 쌀세권 및 소세권 완전 분석 지도

[에세이] (부동산 금수저 빼앗긴 기득권을 위로하는 힐링 에세이) 태어나고 보니 비옥한 초승달지대 입니다만.

[실용서] (한달이면 나도 세계정복) 먹을 수 있는 풀, 기를 수 있는 동물 완전분석 가이드

 

물론 주제가 되는 지리결정론이 나라 간 삶의 격차를 설명하고 있다는 부분에서 번뜩인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주제를 강화하는 방식에서 피곤함을 느낀 책이다. 

 

감상: 지겨울 수 있으니 문학처럼 즐기며 보기

혹시 누구든 이 책에 도전했는데 비슷하게 반복 때문에 책을 그만 읽고 싶다는 충동이 자꾸 느껴진다면 이렇게 생각하는 방향을 잡아보라고 권하고 싶다 -이 책은 너무나 교과서처럼 생겼지만, 어떤 논리의 흐름을 즐기려 든다면 생각 외로 단순한 반복에 지치기 십상이다. 오히려 문학책 읽듯이 열거되는 사례와 텍스트의 맛 그 자체를 하나하나 즐긴다는 관점에서 다가서야 여차저차 부록 앞까지 갈 수 있다. 어쩌면 서울대생들이 가지고 있는 핵심 능력은 끝까지 밀고 가는 우직함과 인내력인가, 하는 생각을 들게 만든 책이다.

 

 

밑줄: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가 아니다

그럼에도 이 책이 발명에 대해 서술한 부분은 퍽 마음에 와닿았다. 현재 하고 있는 업무가 기획이며 새로운 것을 만드는 일이라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서비스기획자는 사람들의 필요에 반응하여 이를 구조화하는 일을 한다. 유저 리서치를 할 때, 우리가 가장 많이 듣는 말은 스티브잡스는 유저리서치를 신뢰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싫지만 그 말이 떠오르게 하는 문구였다. 어쩌면 잡스도 사람들의 잠재니즈가 아니라 본인이 직관으로 추구한 것을 세상에 보여준 것일지도 모른다.

 

총균쇠 밑줄 -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가 아니라 발명이 필요의 어머니이다. 우리는 일단 무엇인가 만들고 필요를 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