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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줄거리, 감상과 밑줄

by 하롸랑 2025. 1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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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될 수 없는 삶이라는 스케치 위에서

"인생의 첫 번째 리허설이 인생 그 자체라면 인생에는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렇기에 삶은 항상 밑그림 같은 것이다. 그런데 밑그림이라는 용어도 정확하지 않은 것이, 밑그림은 항상 무엇인가에 대한 초안, 한 작품의 준비 작업인데 비해, 우리 인생이라는 밑그림은 완성작 없는 초안, 무용한 밑그림이다. (p.17)"

 
위의 구절을 담고 있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오래도록 책장을 지키고 있는 가장 좋아하는 책 중의 하나이다. 제목이 심오해 보여서 첫 장 들추기가 지레 겁 났던 기억이 나는데, 어려운 책이 아니며 삶의 통찰이 여기저기 스며있어 묵직이 읽을 맛 나는 책이다.
 

줄거리 - 이해할 수 없는 널 사랑해서 고통스러워

이 책은 거칠게 요약하면 서로를 이해하기 힘든 두 커플의 사랑 이야기이다. 토마시의 불륜과 테레자의 질투, 프란츠의 이상주의와 사비나의 배신이 이야기의 축이 되며 모두가 바라는 로맨틱한 결말은 없고 오히려 전반적으로 너절한 편이다. 뻔한 이야기라고 덮지 말고, 이들은 왜 이렇게 다르면서도 사랑하는가를 곰곰히 바라봐야 한다.
 
 앞에서 말한 '삶은 스케치 자체로 완성되는, 한 번뿐인 기회' 라는 생각을 곱씹어보자. 절대 지워지지 않아서 다시 쓸 기회가 없는 시간 위에 인생을 써 내려가야 한다고 의식하면 모든 순간이 아득해질 정도로 무겁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어떻게 써도 지나가버릴 일이기에 아무렇게나 해버리고 말자는 충동이 인다.
 
이 때문에 삶은 너무 가볍지만 동시에 지나치게 무거운 모순된 속성을 지니게 된다. 이 역설 속에서 사람들은 삶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에 대해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 선택할 수밖에 없다. 어느 쪽도 답이라는 사실이 문제다.
 
삶에 내재된 정반대의 모순이 등장 인물들 간의 갈등을 만드는 뿌리가 된다. 이들은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 어느 쪽을 믿느냐에 따라 삶의 태도가 갈리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 다른 타인을 사랑할 수 있고, 결국은 이해 불가능한 벽에 부딪쳐 좌절하게 되는 것이다. 가장 아끼는 존재에게 이해 받을 수 없다는 사실보다 사람을 고독하게 만들 수 있는 일이 있을까?
 
소설 속 인물들의 사랑과 배신, 선택과 후회를 따라가면서 어느 새 자연스럽게 한 편에 서있게 된다. 가벼움의 토마시와 사비나, 무거움의 테레자와 프란츠 - 여기에 모든 시각을 아우르는 기막힌 해법은 없다. 어쩌면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내 곁의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때로는 견디며 사는 수밖에.
 
무기력한 결론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 관점이 타인을 존중하기 위한 진정한 토대가 된다고 생각한다. 상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의 인식 틀 안에 끼워 맞추는 과정이 필요하다. 전부 이해하려고 애쓸수록 자연히 내 틀 밖에 있는 면을 축소하거나 무시하게 된다. 오히려 이해에 한계가 있음을 인정함으로써 그를 온전히 수용할 수 있는 것이다.
 

감상 - 돌이킬 수 없는 시간과 반복의 환상

한시도 멈추지 않고 일직선으로 달리며 휘발되는 삶은 또한 인간을 행복할 수 없도록 만든다고 한다. 인간의 행복에는 반복이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시간은 원형으로 돌지 않고 직선으로 나아간다. 행복은 반복의 욕구이기에, 인간이 행복할 수 없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 생각의 주인인 테레자는 이유를 상세히 설명하지는 않는다. 반복은 ‘다음엔 더 잘할 수 있다’라는 안도감을 주기 때문이 아닐까 싶
다. 첫 번째 시도가 서툴고 미진하더라도 이후에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 압박감은 비교할 수 없이 가벼워질 것이다.
 
이 지점에서 나는 어쩌면 인간이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운이 좋게도 자전과 공전을 하는 지구에 살기에 하루, 일주일, 일년이라는 시간의 마디를 갖고 있다. 낮과 밤과 절기의 반복은 매번 우리에게 늘 새로운 시작이 있다는 환영을 심어준다. 오늘을 망쳤다면, 내일은 새로운 오늘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큰 위안을 가져다준다.
 
하지만 깊이 돌아보면 결국 어제와 오늘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살아온 시간이 길어질수록 반복의 환상은 힘을 잃는다. 어느 지점에서는 우리는 이 삶이 돌이키기에 너무 어려워졌다는 것을 깨닫고야 말 것이다. 누구에게든 반드시 그 서늘한 순간이 찾아온다.

 
그럼에도 이 책이 단순히 허무주의만을 의도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참을 수 없는 가벼움 바로 옆에 필연과 무거움을 누구든 눈치챌 수 있도록 뚜렷하게 배치하여, 비록 이 일회용 삶에 바람직한 정답지를 영원히 알 수 없더라도 엄연히 의미가 있음을 드러내려 했던 것이 아닐까.
 
내가 해온 작은 선택들(선택하지 않은 것과 움직이지 않은 것까지 모두 선택이다)과 조그마한 움직임 하나까지 이내 과거가 되며 영원 속으로 박제된다. 이 사실을 생각하면 앞에 놓여있는 아직 오지 않은 순간들을 정성 들여 쓰고 싶어진다. 적어도 내 가치에 부합시키고 싶다. 다른 삶을 살아볼 수 없는 우리 각자의 스케치를 합당하게 평가할 수 있는 이는 결국 자기 자신 뿐이기 때문이다.
 
 

밑줄 - 행복은 반복의 욕구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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