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저녁, 선풍기 틀어놓고 배 깔고 보기 좋은 책
「첫 여름, 완주」를 구매해 첫 장을 넘겼을 때는 '희곡집인가?'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얼핏 연극 대본을 닮아있다. 다 읽고 맨 뒤의 작가의 말을 보면서 뒤늦게 이 책이 시각장애인을 위한 오디오북으로 기획된 작품임을 알게 되었다. 과연, 그래서 책 디자인이 카세트테이프였던 것이었다 (책을 읽는 초반에는 주인공이 예전에 비디오 가게에서 살아서 비디오테이프로 디자인 한 건 줄 알았다).
책은 가볍고 산뜻하다. 똑같이 여름을 주제로 한 「바깥은 여름」과는 대비되는 색깔이다. 여름날의 어느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크고 작은 사건들 속에서 작가의 센스 있는 유머가 섞여 풀어가는 이야기는 경쾌한 코미디 영화 한 편 보는 것 처럼 읽기 편하다. 읽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들리기 위해서 만든 글임에도 극본처럼 구조화된 이어 있어 그런지 가독성이 좋았다.
줄거리 - 절친에게 돈 뜯긴 성우, 그 친구네 고향에서 회복하다
주인공 성우 손열매는 절친이었던 고수미에게 집세 보증금을 뜯기고, 설상가상 우울증으로 목소리도 잘 나오지 않아 일도 못하게 된다. 그러다 고수미에게도 가족이 있을거란 사실을 깨닫고 돈을 받으러 수미의 고향인 완주로 내려간다. 하지만 수미의 남은 가족인 엄마는 장의사가 직업인 암환자이고, 돈 갚을 여력은 없다고 단호하게 말하며 대신 원하는 만큼 수미네 집에 머물러도 좋다고 허락한다.
그렇게 손열매는 엉겁결에 그곳에 눌러앉아 다양한 완주 사람들을 만난다. 외계인처럼 수상한데도 너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사는 어저귀, 서울로 이사가서 아이돌이 되고 싶은 양미와 다문화 가정 아이들, 개발 찬반을 앞두고 날이 선 마을 사람들까지. 이들과 엮이고 사연을 풀어나가면서 힘을 얻어 결국 손열매 자신의 문제를 마주하게 되는 이야기이다.
감상 - 어둡고 무거운 이야기를 웃으며 풀어내다
등장인물들이 말하는 태도가 워낙 명랑하고 유머가 잔뜩 섞여 있어서 잘 눈치채기 어려운 부분인데, 사실 이 책에서 언급되는 사건들은 몹시 우울하다. 잘 나가던 투자사 친구에게 돈을 맡겼다가 망하니까 돈을 돌려받기 위해서 그 친구가 죽기까지 바라는 친구들 (이라고 할 수 있나), 홍수로 죽은 아이들과 그 기억을 지워보려 발악하듯 사는 부모들, 항암치료를 포기하고 자신이 들어갈 관을 짜고 살아가는 엄마 등등.
가라앉고자 하면 사람을 찐득하게 바닥까지 내려올 수 있는 사건들 속에서 주인공 손열매는 때로 사람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호통치듯 외치며, 성의껏 위로도 하며 함께한다. 물론 그렇게 해서 문제가 해결까지 이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자기 앞만 보고 걸어가다가 옆 사람을 한번 돌아보게까지 하는 정도의 힘은 가지고 있다. 슬픈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으로 슬픈 일이 없어지지는 않겠지만 벗어나야 할 때는 잠시 눈을 다른 곳에 돌리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다. 겪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슬픔은 길고 질겨서 이겨내는데에 여러가지 방법이 필요하다.
솔직히 이 책에서 보여주는 밝음은 다소 비현실적이다. 등장인물들은 조금씩 극화되고 과장되게 연출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책에서, 영화에서 항상 현실 자체를 그대로 반사해보고 싶은 것이 아니다. 이 책은 여름의 분위기를 느끼면서 가볍게 기분전환하고 싶을 때 추천할 만한 잘 만든 가족영화 한 편 같았다.
밑줄 - 우리는 각자의 몫을 또 완주해야 하니까요
이 부분을 처음 읽었을때 코끝이 시큰했다. 다시 보니 특별할 것 없는 라디오 방송 멘트였는데, 분명 이 문장 하나를 보고 리뷰를 써야겠다고 결심까지 했는데 시간이 좀 지나고 나서 대체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감정이 날아가기전에 빠르게 기록해야겠다...). 어쨌거나 대단할 것 없어도 실망스러운 날들만 쌓여가도 우리 모두 삶의 몫을 완주해야겠지.
손열매: 방금 뭐예요? 정전기 같은 건가?
어저귀: 굳이 설명한다면 친교적 조력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살아 있는 것들이 살아 있는 것들을 돕고 싶어 하는 마음.
p.157
살아있는 것들이 살아 있는 것들을 돕는다. 이것이 이 소설의 큰 테마이며, 아무튼 나는 이런 따뜻한 시선을 가진 소설 쪽이 취향이긴 한 것 같다. 우리는 다만 지금 살아 있기에, 다른 살아있는 것에 관심 갖고 도울 필요가 있는 것이다.
손열매: 사람이 아니고 사랑을 잃었다고, 사랑.
할아버지: 사랑? 이, 사랑은 잃는 게 아니여. 내가 내 맘속에 지어 놓은 걸 어떻게 잃어?
p.212
이 소설의 백미와 같은 죽은 할아버지가 꿈에 등장하는 씬들. 열매 목소리가 들리는 것 처럼 생생한 사투리가 찰지다. 마치 영화 쇼생크탈출에서 음악은 사람의 마음과 머리에 있기에 빼앗을 수 없다고 한 것처럼, 사랑도 그러하다. 사람은 잃어도 사랑은 마음에 있는 한은 잃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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